외국어는 우리에게 날개이기도 하지만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무언가 조사할 때 외국어를 할 줄 알면 그 정보량은 배로 늘어나지요. 이때 외국어는 날개입니다. 하지만 외국어로 발표를 하는 상황은 어떻습니까? 모국어만큼 유창하고 적확한 표현을 사용한 발표가 가능할까요?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합니다. 이 경우 외국어는 족쇄가 됩니다. 모국어로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을 100퍼센트 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학습한 것이 2011년, 중학교 2학년 때이니 올해로 일본어를 배운지 12년이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에게 일본어는 극복하지 못한 산이기만 합니다.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무지개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소년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손에 닿을 것만 같았던 무지개는 소년이 아무리 다가가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언어란 무지개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조차 한국어를 완벽히 습득했다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외국인이라면 오죽할까요?
사실 일본에서 일본어를 참 잘한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외국인이라는 전제하에 나온 칭찬입니다. 제가 일본인이라면 참 말못한다는 평가를 받았을테지요. 어쩌면 외국인이라는 둘레 속에서 제 일본어 실력에 만족하면서 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무지 제게는 저 멀리 네이티브의 유창성과 표현력이 탐이 나고 탐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멀리 있는 무지개를 쫓고자 하는 마음은 때로는 제 일본어 실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향상심이기도 했지만 오랜 기간 제 언어 실력에 회의감을 가지게 하고 무력감을 안겨주는 족쇄이기도 했습니다.
외국어 실력에 대한 무력감은 여느 다른 학문과 결을 달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학문은 원어민이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미적분을 하는 사람은 없지요. 모두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산수를 하고 중고등학교 때 미적분을 배웁니다. 하지만 외국어 실력은 모국어 화자라는 강력한 비교대상이 존재합니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자주 무력감을 안겨줍니다. 외국어 학습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꾸 무너지는 젠가를 쌓는 일이 어렵듯이 말입니다.
제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일본어와 함께 했지만 아직도 저에게 일본어는 어렵기만 합니다. 아직도 3페이지가 넘어가는 일본어 학술지를 읽지 못하고 번역기에 기대고 맙니다. 일본어로 진행되는 회의는 한국어로 진행되는 회의보다 몇 배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그런데 주변 모든 것이 일본어로 가득한 상황을 제가 감히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사전을 검색하고 검색이 여의치 않으면 그저 아는 척하며 넘어가야 하는 삶... 물 속에 들어가면 목소리가 번져서 잘 들리지 않듯이, 집중하지 않으면 그저 둥둥 떠다니는 말을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삶...
그저 무섭기만 합니다. 아직도 자신이 없기만 합니다. 나약한 목소리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저는 나약합니다. 그래서 모든 해외생활을 하는 분들이 대단하게만 느껴집니다.
대학생활이 점점 막을 내리는 것이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당당히 일본에 가서 살아보겠다 말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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