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자바스크립트에 대해 배웠다!! 프리트랙에서 파이썬이랑 자바스크립트를 했는데, 문제 풀 때 자바스크립트가 술술 풀려서 나름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ㅎㅎ
하... 근데 그때 배운 자바스크립트는 정말 빙산의 일각이었다. 클로저니 일급객체니 하는데 설명 들을 때는 아! 싶었는데 돌아서니 모르겠음
처음보는 용어가 너무 많아서 용어집을 따로 만들어서 정리해야겠다. 이것도 포스팅에 추가해야지
2023.03.07
오늘은 첨으로 성수에 있는 엘리스랩에 가서 수업을 들었다. 맥 첨 써봐서 당황스러웠는데 커멘드는 윈도우 컨트롤이랑 같은 기능이다. 새로운 이벤트가 있으면 꼭 얼리어답터마냥 먼저 써보는 편인데, 그래야 나중에 쓸 때 익숙해서 당황안하기 때문이다. 가길 잘 한듯 ㅎㅎ 근데 다른 기수 분들도 많아서 동기 찾기도 어렵고 말 걸기도 뻘쭘했다 ㅎㅎ 혼자 10시까지 공부하다 귀가
어제는 자바스크립트 후반부 내용이 머리아팠는데 실습 문제들은 앞부분 내용이라 수월하게 풀었다. 아직 포기하긴 일러!!
설명 듣기 전에 혼자 함 풀어봤는데 정답 뜰 때 그 기쁨 ㅎㅎㅎ 잘하고 있어
2023.03.08
메소드들이 점점 늘어나니 살짝 헷갈린다.
화살표 함수는 설명 들으면 알겠는데, 화살표 함수로 적힌 걸 보면 당황스럽다. 막 안읽히고 그래...
this 부분도 많이 어려워서 다른 블로그도 읽으면서 공부해봐야지
2023.03.09
실시간 수업과 다르게 기본적인 자바스크립트 문법을 하는 시간이었다. 휴 살 거 같아...ㅎㅎㅎ if문 조건문 같은 것들! 프리스택에서도 했구 C언어 같은 다른 언어에서도 배웠던 거라 비슷비슷해서 수월했다
그동안 잊고 있던 1차 스터디 마감이 다가왔다 까먹고 있다가 확인해보니 어느새 몇몇 스터디는 인원이 마감되었다.
컴퓨터는 하나하나 다 떠먹여줘야 한다. 컴퓨터한테 사람 대하듯 융통성있게 돌아가기를 요구하지 말고, 내가 컴퓨터처럼 사고하자. 설마 이정도는 알겠지라는 건 없다. 컴퓨터는 내가 알려줘야 안다.
5. 같이 가기
같이 공부하는 사람은 경쟁자가 아닌 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동반자다. 회사에서 경쟁자로 생각하는 사람과 누가 협업을 하려할까? 같이 공부하는 사람 때문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지는 것이다. 애초에 같이 공부하는 사람 때문에 떨어질 일도 없다. 도와주면 멀리 간다. 나를 위해서라도 남들을 도와줘야 한다.
6. 영어 공부하기
프로그래밍 언어는 영어로 되어 있고, 표준 역시 영어로 정의되어 있다. 용어도 영어로 된 것이 많고, 영어가 더 이해하기 쉬운 경우가 많다. 영어를 해서 더 쉬운 길로 가자. 인터넷 세상의 80% 이상은 영어로 되어 있다. 무엇을 검색하든 영어로 하는 것이 정보가 많다.
7. 뭐든지 기록하기
적지 않으면 사라진다. 적어두면 다시 돌아온다. 새로 깨달은 부분이 있거나 배운 부분이 있다면 꼭 적자. 그리고 모르는 부분이 있다고 당장 해결이 안되더라도 일단 적자. 나중에 보면 해결될 수도 있으니까.
8. 책 읽기
인터넷 매체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또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알려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IT와 CS관련 책을 읽어서 부족한 배경지식을 채우자. IT관련 책이 아니더라도 다른 분야에서 배운 지식이 프로그래밍에 있어 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헷갈리는 개념이 있을 때 비슷한 다른 분야의 개념을 통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
개미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 세상을 구성하는 법칙인 물리학을 알지 못한다. 개미에게 세상은 마법이다. 하지만 인간은 알 수 있다. 인간에게 세상은 잘 짜여진 시스템이다. 나는 내가 매일 쓰는 컴퓨터가 어떻게 구성되고 돌아가는지 알고싶다. 아니 모르는 게 너무 분하다. 그래서 알아야겠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제 마술쇼를 구경하는 관객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올해 크게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본래 꿈꾸던 일본어 통역사를 포기하고, IT에 몸을 담아보고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였다. 갑작스럽게 프로그래밍이라는 지금까지 겪어본 적도 없는 길을 선택한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오늘은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첫째, 살아남기 위해서다. 요즘 IT기술의 발전이 심상치 않다. AlphaGo를 시작으로 chatGPT와 그림을 그려주는 AI까지. 올해 유독 AI에 대한 깜짝 놀랄 일이 많았다. 앞으로 이런 일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지금까지 예술 통역 이런 일은 절대로 AI가 대체할 수 없다고 호언장담하던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체할 수 없다는 영역이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다. 앞으로 많은 직업이 IT의 영향을 직격탄으로 맞을 것이다. 내가 선택하는 직업이 IT의 영향을 받을지를 고려하는 것은 중요하다. 산업혁명 시기 마부를 꿈꾸는 것만큼 특정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요즘 세상이 보여준다.
많은 통역일을 하는 선생님께서 통역은 절대로 대체되지 않을 것이라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통역일을 하는 선생님께서 AI와 IT기술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궁금하다. AI에 대해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AI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예술가가 아무리 예술 분야는 절대로 대체되지 않을거다라고 말해도 그 사람이 AI 전문가가 아니라면 무턱대고 그 말을 믿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바둑이 경우의 수가 많다며 AI가 이기지 못할 거라 했던 2016년 AlphaGo 대국 때의 바둑 전문가들을 생각해보라.
둘째, 그렇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IT다. 사물 인터넷이라는 말을 보면 알겠지만, 예전에 IT와 연관이 없던 모든 분야가 IT의 영역 안에 들어왔다. 금융의 영역이던 은행은 IT기술이라는 날개를 달아 핀테크로 변모했고, 자동차는 자율주행을 꿈꾸게 되었다. 폴란드어를 하는 사람은 폴란드와 일을 하는 기업에만 필요하지만, 영어를 하는 사람은 어느 기업에서든 환영받는다. IT는 차세대 영어다. 영어를 쓰지 않는 곳이 없듯, IT 또한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어쩌면 영어보다 더.
셋째, 불편한 점을 스스로 개선할 수 있다. IT기술을 다루는 사람은 이제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이다. 소비자는 그저 시장에 나와있는 제품을 소비할 뿐이다. 본인이 원하는 제품이 있다면, 기업에서 그러한 제품을 만들어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생산자는 다르다. 생산자는 본인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 냉장고에 있는 식품의 유통기한을 입력하면 해당 날짜에 알람을 보내도록 설정하는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 살다보면 여러 불편한 점이 생기고, 이 중에서는 IT기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이러한 기술을 다룰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삶을 더 편리하게 만들 수 있다. 기업이 불편한 점을 알아차리고 해결책을 주기 전에 말이다.
넷째, 장소의 제약이 사라진다. IT업계는 컴퓨터로 일을 한다. 컴퓨터와 네트워크만 있다면 내가 파리에 있든 도쿄에 있든 상관없이 업무가 가능하다. 재택 근무와 디지털 노마드가 가능하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같은 감염병 상황에서도 언제든지 유연하게 업무 조정이 가능하다. 여행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장소의 제약이 없다는 것이 엄청난 매력이지 않을 수 없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카페에 노트북을 켜고 일을 한다니 얼마나 멋진가.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IT업계를 벗어나면 이러한 선택조차 불가능하다. 소방관과 경찰관이 직장을 놔두고 파리에서 근무가 가능할까? 파리 소방서와 경찰서가 아니라면 힘들 것이다. IT업계는 다른 어느 업계보다도 장소의 제약에서 자유롭다.
다섯째, 소프트웨어는 한계가 없다. 우리는 비행기가 아니면 날 수 없다. 하지만 컴퓨터 세계 속 우리는 어떠한가. 프로그램 코드를 구현하면 우리의 아바타는 날아다닐 수 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이 소프트웨어의 세계 안이라면 구현할 수 있다. 집채만한 지우개도, 몇천년 전에 터진 화산의 위력도 컴퓨터로 재현할 수 있다.
여섯째, 직장을 잃어도 기술은 남는다. 문과 직렬에서 쌓은 커리어는 온전히 그 회사를 위한 것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은퇴를 하면 회사에서 쌓은 직무 능력이 재취업시 활용하기 어렵다. 어렵게 재취업을 하더라도 그 회사에 맞게 새로 시작해야 한다. 문과 직렬에서 법무와 회계가 아닌 이상 진입장벽이 높은 기술을 가지고 있는 직렬은 많지 않다. 하지만 프로그래밍 능력은 직장을 벗어나도 존재하며 활용 가능하다. 직장이 아닌 프리랜서라는 선택도 가능하다. 평생 직장이 사라지는 요즘 세상에서는 더더욱 중요한 사항이다.
일곱째, 준비과정이 명확하고 가시적이다. 문과 계열의 많은 직렬이 자기소개서와 면접전형에서 정성평가를 받게 된다. 따라서 명확하게 통과되는 커트라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험을 수치화하더라도 모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열심히 대외활동 성공경험 리더십 경험을 어필하지만 합격 기준을 따지자면 모호하기만 하다. 하지만 IT계열은 명확하게 요구 능력을 제시하고 본인이 요구하는 능력을 충족하는지 판단하기가 다른 직군보다 쉬운 편이다.
여덟째, 개발하는 환경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동아리 친구들이나 군대 동기 등 내가 100% 어문계열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컴퓨터공학 전공이나 IT계열에 재직중인 사람들이 많았고, 어깨 너머로 바라보다 보니 개발자가 하는 일에 대해 많이 듣고 배웠다. 맨땅에서 시작하기 보다 주변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보니 안심하고 시작할 수 있다. 언제든지 물어볼 수 있는 현직자를 곁에 두고 배움을 시작하는 건 매우 큰 이점이다.
아홉째, 나의 성향과 어울리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평양감사도 제 싫다면 그만이듯, 아무리 좋은 일도 나랑 맞지 않는다면 그저 괴로울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적성에는 맞는 거 같다. 교양수업으로 C언어를 배웠을 때 나름 좋은 성적도 거두었고, 새로운 걸 배워서 살짝 힘들긴 했지만 그걸 넘어서는 재미가 있었다. 열심히 생각해서 구현했을 때 제대로 작동할 때의 기쁨.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운 문제를 풀수록 그 기쁨은 커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물론 아직까지 본격적인 프로그래밍을 시작한 것은 아니다. 두근두근하는 마음도 불안한 마음도 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프로그래밍이라는 것이 배워서 손해볼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프로그래밍은 앞으로 내 삶에 있어 큰 무기가 될 것이다. 설사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통역의 길을 밟게 되더라도, IT영역에서 쌓은 지식은 탄탄한 전문분야 하나를 만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IT소양은 요즘 세상의 핵심 역량이다. 결코 개발자만의 무기는 아니다.
지젝이란 철학자는 유명한 철학자이지만, 한국에서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듯 하다. 그 이유로는 아무래도 고등학교 윤리나 도덕 교과서에 그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젝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철학에 대해 아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로는 그에게 영향을 준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라캉 등의 철학자들이 읽기 쉬운 편은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아무래도 슬라보예 지젝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헤겔과 라캉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등 수많은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동반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먼저 발목을 잡았다. 따라서 먼저 라캉과 헤겔이라는 두 철학자의 철학을 지젝은 어떻게 해석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지젝이 말하는 라캉을 통해 헤겔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선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을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지젝이 말하는 변증법의 정반합에서 합은 단순히 합치는 것이 아닌, 모순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지젝은 여기서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결합한다. 라캉 철학에서 상징계란 우리의 언어체계를 말한다. 이때 기표는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게 된다고 말하는데, 결국은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지젝의 말에 따르면 결핍인데, 결국 실재계를 나타내는 상징계가 그것을 온전히 표현해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상징계는 실재계가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상징계가 실재계를 온전하게 드러낸다면 그것은 곧 실재계가 된다. 따라서 상징계는 자신의 결핍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일이 되는 것이다. 만약 상징계의 기표가 기의를 완전히 나타낼 수 있다면, 주체와 타자의 구분은 사라지고 결국 이는 주체의 소멸을 의미하게 된다. 우리는 상징계의 결핍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이론은 욕망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혹자는 지젝의 이러한 헤겔을 통한 라캉의 해석이 올바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설령 그 철학자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지젝의 철학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첫번째 매트릭스 세계는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는데, 그 이유로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한 이상사회를 견딜 수 없었고, 불안과 결핍이 있어야 비로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들었다. 우리는 항상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지만, 그 욕망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욕망하는 상태에 남는 것이다. 이것이 곧 결핍이다. 지젝의 헤겔을 통해 본 라캉철학은 굉장히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영화 매트릭스의 개봉이 1999년임에 비해, 슬라보예 지젝의 첫번째 저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1989년에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매트릭스에 나온 철학들이 데카르트부터 라캉, 불교철학까지 다양하고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당연히 매트릭스 개봉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하지만 매트릭스라는 미디어 매체를 통해 대중들을 철학적 사유의 길로 인도했다. 우리 근처에 각종 미디어가 출현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따라서 철학에서도 미디어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철학을 한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이 점에서 영화와 농담을 통해 대중들을 끌어모으는 지젝의 행보는 철학자로서는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지젝을 MTV 철학자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지젝이 적정기술과 같이 적정인문학도 필요하다 말했듯, 나 또한 인문학을 대중들에게 가까이 전달하는 것은 바람직한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지젝에 동의하는 바이다. 지젝만큼 유튜브에 나와 이야기하고 독특한 말투와 몸짓으로 대중을 휘어잡는 철학자가 얼마나 있는가 말이다. 특히나 그가 이야기하는 모순에 대한 농담과 말들은 설령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더라도 우리 마음 속에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점점 그의 말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의 철학이 헤겔과 라캉 철학을 뿌리로 두고 있는 만큼, 그의 말이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다소 아쉬울 뿐이다.
지젝은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 즉 시스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남겼다. 현대시대 공산주의가 붕괴되고 난 이후 세계에서 포스트모던주의자는 탈이데올로기를 주장했지만, 지젝은 그것조차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한다. 이데올로기를 벗어났다고 믿는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종말을 이야기했듯이, 그 또한 자본주의의 끝을 이야기한다. 이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이야기했던 “역사의 종말”과는 반대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흔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하나의 세트이며, 이 두 체제가 당연히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젝은 이러한 믿음은 근거가 없으며, 자본주의 스스로의 한계로 인해 결국은 종말을 맞을 것이라 말한다. 실제로 현재 사회에서 공산주의 이후 자본주의로 전향한 국가 중에서 완벽한 민주주의를 이행하는 나라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이야기하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오늘날에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동안 자본주의는 수정을 거듭해왔다. 뉴딜정책과 수정자본주의, 신자유주의까지. 하지만 지젝은 자본주의를 조금 손보는 정도로는 그 근원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 지적한다.
여기서 지젝이 제시한 것은 공산주의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레닌주의나 스탈린주의와 같이 실패한 공산주의를 다시 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공산주의다. 하지만 지젝이 말하는 새로운 공산주의란 어떤 것인지, 왜 다른 체제가 아닌 공산주의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이에 대해 자신은 문제제기에 의의를 두고 있다고 말하지만, 철학자로서 그가 어떤 체제를 생각하고 있는지 들을 수 없다는 것은 굉장히 공허하면서도 아쉬운 부분이다.
지젝은 새로운 방향성을 우리에게 던졌다. 라캉과 헤겔에 대한 새로운 해석, 그리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새로운 체제의 가능성을 말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대중에게 가까운 철학자라 할 수 있다. 또한 스스로 좌파 철학자이자 마르크스 주의자라 말하지만 정치적 올바름과 언더도그마를 누구보다 경계한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 새로운 체제가 왜 마르크스 주의여야 하고 어떤 체제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은 점, 그리고 대중적으로 다가오지만 그의 철학이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편이라는 점은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자음과모음, 2011.
토니 마이어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앨피, 2005.
최영송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논문
최진석 “슬라보예 지젝과 공산주의의 (불)가능성”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11권 제3호, 2014.
김원호 “S. 지젝의 비평담론 연구” 경북대학교 대학원, 2007.
웹사이트
웹진<제3시대> “[비평의 눈 : 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9] 지젝(2) : 헤겔 같은 라캉, 라캉 같은 헤겔(허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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