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이란 철학자는 유명한 철학자이지만, 한국에서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듯 하다. 그 이유로는 아무래도 고등학교 윤리나 도덕 교과서에 그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젝이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철학에 대해 아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 이유로는 그에게 영향을 준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 라캉 등의 철학자들이 읽기 쉬운 편은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아무래도 슬라보예 지젝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헤겔과 라캉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등 수많은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동반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먼저 발목을 잡았다. 따라서 먼저 라캉과 헤겔이라는 두 철학자의 철학을 지젝은 어떻게 해석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지젝이 말하는 라캉을 통해 헤겔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선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을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지젝이 말하는 변증법의 정반합에서 합은 단순히 합치는 것이 아닌, 모순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지젝은 여기서 라캉의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결합한다. 라캉 철학에서 상징계란 우리의 언어체계를 말한다. 이때 기표는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게 된다고 말하는데, 결국은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지젝의 말에 따르면 결핍인데, 결국 실재계를 나타내는 상징계가 그것을 온전히 표현해내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상징계는 실재계가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상징계가 실재계를 온전하게 드러낸다면 그것은 곧 실재계가 된다. 따라서 상징계는 자신의 결핍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일이 되는 것이다. 만약 상징계의 기표가 기의를 완전히 나타낼 수 있다면, 주체와 타자의 구분은 사라지고 결국 이는 주체의 소멸을 의미하게 된다. 우리는 상징계의 결핍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이론은 욕망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혹자는 지젝의 이러한 헤겔을 통한 라캉의 해석이 올바르지 않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설령 그 철학자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 하더라도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지젝의 철학은 큰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첫번째 매트릭스 세계는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는데, 그 이유로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한 이상사회를 견딜 수 없었고, 불안과 결핍이 있어야 비로소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들었다. 우리는 항상 욕망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지만, 그 욕망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욕망하는 상태에 남는 것이다. 이것이 곧 결핍이다. 지젝의 헤겔을 통해 본 라캉철학은 굉장히 흥미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영화 매트릭스의 개봉이 1999년임에 비해, 슬라보예 지젝의 첫번째 저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 1989년에 나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매트릭스에 나온 철학들이 데카르트부터 라캉, 불교철학까지 다양하고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당연히 매트릭스 개봉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하지만 매트릭스라는 미디어 매체를 통해 대중들을 철학적 사유의 길로 인도했다. 우리 근처에 각종 미디어가 출현한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따라서 철학에서도 미디어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디어를 통해 철학을 한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이 점에서 영화와 농담을 통해 대중들을 끌어모으는 지젝의 행보는 철학자로서는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지젝을 MTV 철학자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지젝이 적정기술과 같이 적정인문학도 필요하다 말했듯, 나 또한 인문학을 대중들에게 가까이 전달하는 것은 바람직한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지젝에 동의하는 바이다. 지젝만큼 유튜브에 나와 이야기하고 독특한 말투와 몸짓으로 대중을 휘어잡는 철학자가 얼마나 있는가 말이다. 특히나 그가 이야기하는 모순에 대한 농담과 말들은 설령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더라도 우리 마음 속에 무언가 말하고자 하는 느낌을 준다. 따라서 점점 그의 말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의 철학이 헤겔과 라캉 철학을 뿌리로 두고 있는 만큼, 그의 말이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다소 아쉬울 뿐이다.
지젝은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 즉 시스템에 대해서도 의견을 남겼다. 현대시대 공산주의가 붕괴되고 난 이후 세계에서 포스트모던주의자는 탈이데올로기를 주장했지만, 지젝은 그것조차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한다. 이데올로기를 벗어났다고 믿는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종말을 이야기했듯이, 그 또한 자본주의의 끝을 이야기한다. 이는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이야기했던 “역사의 종말”과는 반대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흔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하나의 세트이며, 이 두 체제가 당연히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지젝은 이러한 믿음은 근거가 없으며, 자본주의 스스로의 한계로 인해 결국은 종말을 맞을 것이라 말한다. 실제로 현재 사회에서 공산주의 이후 자본주의로 전향한 국가 중에서 완벽한 민주주의를 이행하는 나라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에서 이야기하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오늘날에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동안 자본주의는 수정을 거듭해왔다. 뉴딜정책과 수정자본주의, 신자유주의까지. 하지만 지젝은 자본주의를 조금 손보는 정도로는 그 근원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 지적한다.
여기서 지젝이 제시한 것은 공산주의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레닌주의나 스탈린주의와 같이 실패한 공산주의를 다시 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공산주의다. 하지만 지젝이 말하는 새로운 공산주의란 어떤 것인지, 왜 다른 체제가 아닌 공산주의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이에 대해 자신은 문제제기에 의의를 두고 있다고 말하지만, 철학자로서 그가 어떤 체제를 생각하고 있는지 들을 수 없다는 것은 굉장히 공허하면서도 아쉬운 부분이다.
지젝은 새로운 방향성을 우리에게 던졌다. 라캉과 헤겔에 대한 새로운 해석, 그리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새로운 체제의 가능성을 말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대중에게 가까운 철학자라 할 수 있다. 또한 스스로 좌파 철학자이자 마르크스 주의자라 말하지만 정치적 올바름과 언더도그마를 누구보다 경계한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그 새로운 체제가 왜 마르크스 주의여야 하고 어떤 체제인지에 대해 말하지 않은 점, 그리고 대중적으로 다가오지만 그의 철학이 상당히 이해하기 어려운 편이라는 점은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이현우 “로쟈와 함께 읽는 지젝” 자음과모음, 2011.
토니 마이어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앨피, 2005.
최영송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논문
최진석 “슬라보예 지젝과 공산주의의 (불)가능성”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11권 제3호, 2014.
김원호 “S. 지젝의 비평담론 연구” 경북대학교 대학원, 2007.
웹사이트
웹진<제3시대> “[비평의 눈 : 포스트모더니즘과 주체9] 지젝(2) : 헤겔 같은 라캉, 라캉 같은 헤겔(허석헌)”
한국 인천 → 중국 베이징 → 러시아 모스크바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 에스토니아 탈린 → 핀란드 헬싱키 →스웨덴 스톡홀름 → 노르웨이 오슬로 → 덴마크 코펜하겐 → 덴마크 빌룬드 → 독일 베를린 → 체코 프라하 → 오스트리아 빈 →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 헝가리 부다페스트 →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 루마니아 프라호바 → 루마니아 브라쇼브 → 루마니아 이아시 → 이탈리아 로마 → 바티칸 시국 → 포르투갈 리스본 → 영국 런던 → 프랑스 파리 → 스위스 베른 → 리히텐슈타인 파두츠 → 스위스 취리히 → 룩셈부르크 → 벨기에 브뤼셀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 스페인 마드리드 → 폴란드 바르샤바 → 한국 인천!
사진 꿀팁을 주자면 이렇게 바닥에 삐뚤빼뚤한 선이 하나 있는데 여기서 찍으면 가운데에 딱 나온다
혹시 나처럼 수평 데칼코마니에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면 ㅎㅎㅎㅎ
저멀리 국기가 바람에 나부낀다
최대한 잘 보이게 찍어보려 했는데 어렵당...
자꾸 바람에 날려서...
가까이 본 깃대는 이런 느낌
이렇게 높은데 안 쓰러지는 게 신기하다
밖으로 고고
오늘 날씨가 너무 그렇다 ㅠㅠ
아까 들어온 문
문 근처에서 파룬궁을 하고 계신다
ㅎㅎㅎ 잘 찍은 거 같애 내가 봐도
한 컷 더
맞은편에 있는 건물은 국가도서관이라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국회도서관 아니면 국립중앙도서관?
구구구
열심히 식사하시는 비둘기 선생님
얼얼바(2.28)평화기념공원으로 가는 중
중간에 동상이 이렇게 세워져 있었다
신기하게 생긴 건물이 있다
찾아보니 타이베이 빈관(賓館)으로 국가 귀빈을 접대하는 장소라고 한다
정부 시설 같은 건물도 발견
대만 외교부 건물이라고 한다
기왓집 건물이 도로 사이에 덩그러니 있다
경복궁 동십자각 같은 느낌?
저멀리 타이베이 101 빌딩이 보인당
늘어서 있는 오토바이들
구급차가 지나가는데 한국 차다
가는 길에 보도가 이상해서 살펴보니 이렇게 무언가 적혀 있다
문학의 길이라고 한다
요 근처에 대만 총독부 건물이 있다고 들어서 찾았는데 도무지 안 보인다
찍을 때는 이게 총독부 건물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대만국립대학병원 건물이었다ㅠㅠ
얼얼바평화기념공원 도착!
얼얼바는 숫자 228을 중국어로 읽은 것이다
2.28사건을 추모하는 의미로 세워진 공원이다
기념관이랑 국립대만박물관이 있다
차이잉원 총통
대만 원주민 문제를 다루는 것 같다
남도민족이동과 남도민족분포도
원주민 토지 약탈의 시기적 구분
대만의대병원역 앞에 이렇게 설치되어 있다
이런 설치물이 곳곳에 보인다
기념관에 도착
들어가려는데
앗...
긍일휴업...ㅠㅠ
아쉬운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큰 책도 놓여 있고
마음을 담은 리본들
희생자 명단인 모양이다
71주년 행사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곧 있으면 2월 28일이다
세계 인류가 평화롭길 바라는 메세지를 여러 언어로 적어 놓았다
기념비로 고고
공원은 이런 느낌
기념비에 도착
묵념...
대만도 한국처럼 비슷한 시련을 겪었다
먹을 것을 찾아 땅으로 내려온 다람쥐ㅎㅎㅎ
비둘기들이 별 신경 안 쓰는게 너무 웃겨
나무 생긴 모양이 조금 특이하다
가운데 분수도 있다
다리를 건너서 밖으로
공원 안에 호수가 있다
관광하러 올 때 2.28평화기념에 방점을 두었는데 공원이라는 본연의 기능에도 충실하다
국립대만박물관 도착
뚀륵...
너도 휴관이니
타이베이역 근처여서 타이베이역으로 가기로 했다
문지기처럼 양 옆을 지키는 황소 둘
대만도 간판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예전에 홍콩 여행 같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고궁박물원에 밀려서 눈물 나오는 국립대만박물관 홧팅
저기... 빨간불인데요
배가 고파서 편의점에 들어왔다
책이랑 잡지도 팔고 있다
신문도 판다
대만 신문은 컬러다
사진만 컬러가 아니라 글씨도 원색 컬러에 엄청 화려하다
헉 쪼꼬우유!!
대박대박
ㅎㅎㅎ 유혹을 못 이기고 하나 샀당
대만도 손님 없으면 핸드폰 한당 ㅎㅎㅎ
알바문화는 한국이랑 비슷한듯
대만도 토익 토플학원이 있당
또 발견한 야마다 택배
아까 먹을 게 별로 없어서 다른 편의점에 가기로 했다
여기도 패밀리마트
앗 스키야 발견
이미 먹을 걸 사서 패스 ㅎㅎㅎ
여기도 영어학원이
앗 쥬씨 발견
자주 가는 곳은 아니지만 외국에서 보니까 반갑당
타이베이역에 도착
지하철을 타고 국부기념관에 갈 생각이다
지하철 타러 고고
국부기념관역에 도착
저기 보인당
기와긴 한데 조금 신기한 느낌
옆면
의자에 앉아 계신 쑨원 할아버지
바닥에 이렇게 타일아트가 그려져 있다
타이베이 101 빌딩이 저멀리 보인당
좀 더 가까이
정문에 도착
들어가니 이미 사람들로 왁자지껄
교대식을 하고 있었다
아슬아슬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ㅠㅠ
동상 앞에서
교대 인원이 양 옆에 올라가면 나머지는 다시 돌아온다
가만히 있어야 되기 때문에 복장을 정리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
교대식 끝
천장은 이렇게 생겼다
정면에서 한 컷
옆에 전시관이 있다
국민정부건국대강이라 적혀 있다
큼지막하게 벽에 또 적혀 있다
전시관 내부
사각사각하면 지루하기 쉬울 공간을 입체적으로 잘 꾸몄다
쑨원 초상화
돈에도 계신다
다시 중앙으로 나왔다
옆에서 본 동상
어떻게 저렇게 가만히 계속 있을 수 있지
볼 때마다 신기하다
밖으로 나왔다
허겁지겁 들어오느라 못 둘러본 건물
참 특이하게 생겼다
휘날리는 깃발
건물이 조금 낡아 보인다
세월의 흔적일까
옆에 호수도 있었다
기념관 앞 콘크리트 광장
타이베이 101도 함께
관광은 이걸로 끝
다시 지하철을 타고 타이베이역으로
귀국이 다가오니 이런 것두 한 번 찍어보고
지하철을 지나가는 경찰 아찌
자하철이 들어오면 이게 반짝하고 빛난다
반짝!
불을 멸한다 해서 멸화기 ㅋㅋㅋㅋ
이런 사소한 다른 점 찾기가 이번 여행의 또 다른 재미였다
다시 만나려면 아직 시간이 걸려서 바로 서점으로 직행
ㅎㅎㅎㅎ 이 분위기 너무 좋아
"편의점 인간"이랑 "야행"
이번 여행의 원수 간장 계란이랑도 작별인사
우리 함께 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저번에도 본 마늘 집!
옆에 배 집이랑 딸기 집도 있다
광고에 적혀진 일본어
중국어도 같이 적혀있으면 모르겠는데 일본어만 적혀있는 건 뭔가 이상하다
막상 일본어는 잘 안 통한다...
타이베이역 빠이빠이
가족이랑 만나서 공항 갈 버스를 찾는 중
군대 광고
공항가는 1819번 정류장
항공사마다 탑승하는 터미널이 다르다
해외여행이 처음이라면 실수하기 쉬우니 조심
마지막으로 보는 타이베이 시내
잘있어 ㅠㅠ
버스에 탑승
흡연구역
독일을 덕국이라 적고 있다 ㅎㅎ
공항에 도착
저멀리 보이는 공항 경찰차
공항에 들어왔다
로비에 도착
너무 늦게 본 WELCOME
출발지는 한중일이 대부분이당
아시아나 항공을 한아항공이라 부르고 있다
출국 구역으로
면세(免稅)를 퇴세(退稅)라 적고 있다
중국어 배우려면 힘들겠당
출국 구역은 사람들로 가득
체크인카운터에 이렇게 등불이 대롱대롱 달려 있다
아시아나 카운터에 도착
20분 지연이다
비지니스는 상무
이코노미는 경제 ㅎㅎㅎ
경제가 아니라 다른 말을 쓸 줄 알았는데
출국심사를 받고 면세점 구역에 왔다
쇼핑이닷 쇼핑
강아지? 아마도...
지연...
버거킹! 한보왕이라 적혀 있다
대만공항에 있는 일본 기념품
가면 갈수록 모르겠다
대만 고디바
펑리수!
먹어봤는데 너무 맛있다
그래서 왕창 샀다 히히
위에는 돈? 같은 게 대롱대롱 달려 있다
으 복잡한 한자...
취옥백채 도자기
딱 봐도 비싸 보인다
사고전서 에코백 ㅋㅋㅋ
아이디어는 좋은데 들고 다니기 쫌 그래...
평면 착시 가방!
하나 사고 싶었는데 조금 비싸서 못 샀당
그래도 살걸...
공항에도 서점이 있다
공항에 서점이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시간 때우기 딱 좋아서 ㅎㅎ
영화관까지 있었다
솔직히 영화관은 있을 줄 몰랐다...
일본 이치란 라멘...
아니 왜 여기있어요?
삶은 달걀 의자 ㅋㅋㅋ
귀여워
이제 비행기 타러 고고
우리가 탈 비행기
기내식이 나왔다
무난무난쓰
다왔당
인천국제공항 도착
평창의 열기가 아직 남아있다
스케이트 선수를 쫓아가는 북극곰
ㅋㅋㅋ 아이디어 봐
잘 만들었다
- 끝 -
여행후기
오랜만에 말 안 통하는 외국에 와서 이국적인 느낌이 확 와닿았다 다만 위생이나 음식이 나랑 잘 안 맞아서 힘들었다 ㅠㅠ 날씨도 내리 비가 와서 다 젖느라 관광을 하는둥 마는둥 제대로 맛집 찾아서 계획에 맞게 방문하면 좋을 것 같다 무계획으로 오면 조금 힘들다 특히 식사는 못 가보고 못 먹어본 곳이 많아서 한 번쯤은 더 올 거 같은데 그 후의 재방문은 그 때에 결정될 것 같다
장점: 가깝다, 음식이 싸다, 일본과 중국을 섞어놓은 느낌 단점: 위생, 음식의 향신료나 냄새, 비가 자주 오는 날씨, 독자적인 분위기나 특색이 없음
대만 노래 "당신이 빨리 돌아오길 바랍니다(望你早帰)"는 대만 부녀자들이 남양 제도 전장에 자리잡고 남편이 하루라도 빨리 살아 돌아오길 기원하며 부른 노래다. 전쟁 후반, 병력 보충에 어려움을 겪은 일본은 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하기 위해 대만 청년을 징병하여 일본군에 참전시켰다. 일본 관방(? 보통 관방은 官房인데) 자료에 따르면 태평양전쟁 당시 2만 7,138 명의 대만 청년이 일본군이 되었으며 그 중 8만 명은 전쟁 후반에 징병되어 정규군에 편성되었다. 그 밖의 12만 명은 군대 잡역 및 보충역으로 복무하였다.
원문은 한문장... 말이 되나
표현이 조금 이상하다 人이 아니라 名를 사용하거나 官方같은 일본어에 없는 단어를 사용하는 둥
다카사고 의용대(*대만 원주민으로 구성된 일본군 부대)는 일본군에서 유일하게 개인무기를 휴대할 수 있었는데, 그건 반도(蕃刀)라고 불리는 무기였다. 그 이유는 그들이 산림 생활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걸 영예로 여겼다. 태평양전쟁 중 미군이 "섬 건너뛰기(island-hopping)" 작전을 펼쳐 일본군은 물자의 이동이 봉쇄되었다. 그로 인해 남양 제도 산림 속에 있던 일본군은 물자 부족으로 탄약과 식량 모두 부족한 상황에 처했다. 이 상황에 산림생활에 익숙한 다카사고 의용대가 반도를 들고 숲 속을 헤치고 일본군을 구출했다. 이 일로 많은 일본인이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원주민에게 감사를 표했다.
1942년 일본정부가 대만에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여, 많은 대만 청년이 대동아전쟁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전후 일본은 국적변경을 이유로 적절한 보상 및 채무의 반환 책임을 회피하였다. 1945년 국민당 정부도 많은 대만 청년을 국공내전에 투입하여 많은 수가 중국 대륙에서 사망하였다. 또한 일부는 포로가 되어 중국 공산군에 편입되었다. 그 중 몇몇은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다른 대만 국적 중공군은 오랜 세월 중국 대륙에 지내다 1989년이 되어서야 대만에 돌아왔다. "가오슝시 전쟁평화기념공원 주제관"이 세워진 이래 많은 사람들이 대만이 전쟁에 휘말린 역사를 알아갔으며 이러한 역사적 비극을 다시는 되풀이해선 아니 된다고 경종을 울렸다. 또한 이 상설전시로 사람들은 혼동의 시기에 있었던 많은 일을 체감했고 덕분에 타국에서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고 평화의 근본을 알 수 있었다.
전쟁에 휘말린 대만의 슬픈 역사 ㅠㅠ
참 남일 같지만 않다
기념관을 나와 포대로 향하는 중
전방 도로가 협소하니 차량은 들어올 수 없다 뭐 이런 뜻인 거 같다
올라가는 길에 본 표지판
옆에서 낙석이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해서 옆에 오래 있지 말고 자기 안전을 지켜라 이런 의미인 거 같다
1879년 준공한 가오슝시 지정사적 다거우 영국영사관 관저는 당시 영국 육군의 왕립 공병(Royal engineer)이 설계, 건축을 도맡아 독립된 빨간 벽돌 구조 건물로 완성되었으며, 이후 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 다거우 영국영사관 사무실(경찰서와 감옥을 포함)은 사오촨터우(哨船頭) 바닷가에 자리잡았고 두 건물은 오래된 등산로로 연결되었다. 1858년 텐진조약 및 1860년 베이징조약이 체결되자, 대만은 점차 무역항 개항 압박을 받았다. 다거우(당시 가오슝)는 그 중 한 곳으로 영국 측은 대만과의 무역에서 경제적인 이익을 더욱 확보하기 위해 영사관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영사관을 통해 이민에 대한 수속, 상업 관리, 영사재판권 및 지방과의 협상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본 건물 다거우 영사관 관저는 영사가 거주하며 사절과 빈객을 접대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895년 일본에 의한 대만통치가 시작되면서 영사관 관저는 가오슝 해양관측소로 용도가 바뀌었다. 또한 1945년 대만이 국민정부의 유지를 잇게 되면서 기상국 관측소로 사용된 적도 있다. 이후 1977년 태풍 셀마(1977년 04호)에 의해 건물에 피해를 입었지만, 해당 건물이 다거우항 개항 이후 무역 경제 및 역사가 발전하는 동안 자리를 지켜온 대단한 문화적 의의를 가진다고 판단하여, 보수를 거친 후 1987년 정식으로 고적에 지정되었다. 다거우 영국영사관 관저는 역사적 자료가 충분치 않아서 긴 세월 동안 영국영사관으로 여겨졌지만, 학계에서 영국 국립공문서관 사료를 면밀히 연구한 결과 영사관 사무실은 사오촨터우 바닷가에 지어졌으며 본 건물은 영사관이 아닌 영사관 관저임이 밝혀졌다. 가오슝시정부문화국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2009년 본 건물의 정식 명칭을 "다거우 영국영사관 관저"로 변경하였다.
프랑스혁명만큼 역사적으로 세계적으로 영향을 남긴 사건도 드물것이다. 물론 프랑스혁명이 당시 조선에 미친 영향은 없거나 있다하더라도 아주 미약할 것이다. 하지만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 프랑스혁명이 미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으며, 이는 한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프랑스혁명으로 만들어진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한 획을 그었으며 현대 정치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프랑스혁명을 이해하는 것은 기본적인 소양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당시 프랑스의 구제도적 모순 즉 앙시앵레짐에 있다. 아직 프랑스에는 신분제가 남아 있었으며, 그 신분은 총 셋으로 나뉜다. 제 1신분은 성직자, 제 2신분은 귀족이며 이 두 신분은 특권계급이다. 그리고 나머지 제 3신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다시 귀족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두 종류로 분화되는데 기존 대검귀족(출생으로 정해진 혈통귀족)과 새롭게 대두한 법복귀족(부르주아출신)이다. 18세기 후반 영주들은 지대 등 공납을 올리고 이미 소멸한 공납까지 징수하고자 했다. (조선시대 삼정의 문란 당시 횡횡했던 황구첨정과 백골징포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러한 과도한 징세는 농민들의 큰 부담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봉건적 반동’이다. 봉건적인 잔재로 인해 고통받은 건 농민들뿐 아니라 부르주아지도 마찬가지였다. 상업과 금융업에 종사하는 시민계급은 신분적으로 귀족의 하위에 속했으며 길드등의 잔재로 자유로운 무역이 어려웠으며 그로 인해 자본주의 발전에 방해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 3신분은 점차 귀족계급에 대한 불만감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 불을 지핀 것이 당시 왕실의 재정문제이다. 흔히 예상하는 바와 달리 혁명의 시작은 귀족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고질적인 왕실의 재정문제는 루이 16세에 이르러 걷잡을 수 없이 비대해졌으며 각종 개혁안을 구상했지만 이해관계로 인해 번번히 실패하였다. (튀르고 개혁안, 네케르 개혁안, 칼론느 개혁안) 귀족 계급은 왕실의 재정위기를 기회로 절대왕권을 억누르고 귀족정치의 실현을 꿈꾸었다. 그렇기 때문에 칼론느가 소집한 명사회에서 그의 개혁안을 거부하고 고등법원을 통해 삼부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재정적으로 파탄이 난 루이 16세는 더이상 거부할 수 없는 상태였고 결국 삼부회가 소집된다.
삼부회의 소집으로 억압받던 제 3신분은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곧 좌절되고 만다. 각 신분은 300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신분별로 투표가 행해지기 때문에 제 1신분, 제 2신분의 투표를 제 3신분이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제 3신분은 머릿수를 기준으로 한 표결을 요구했다. 그와 동시에 국민의회를 선포하고 두 신분에게 참여를 종용하였다. 국민의회의 시작이다.
하지만 곧 국민의회는 회의장이 폐쇄당하게 된다. 이에 시민계급들은 회의장을 베르사유궁전 내의 실내테니스장으로 옮기고 자신들의 요구가 담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이 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테니스코트의 서약) 국왕 루이 16세도 어쩔 수 없이 국민의회에 참가할 것을 나머지 신분에게 지시하였다. 이렇게 사건은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국왕 루이 16세가 베르사유에 군대를 집결시켰다는 소식이 파리에 전해졌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국민의회가 공격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국민의회를 지키기 위해 민병대를 조직하였고, 무기를 찾던 민중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여겨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실제로 바스티유 감옥에는 정치범은 없었고 무기또한 얼마 없었지만 혁명의 첫 승리를 장식한 민중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때 귀족들이 외세의 힘을 빌려 혁명을 진압하려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공포에 휩싸인 민중들은 귀족을 습격하고 성에 불을 질렀다. 이 소식은 바로 파리에 전해졌고, 귀족이 포함된 국민의회 시민대표들은 당황했지만 혁명은 농민의 지지없이 불가능했으므로 곧바로 봉건제를 폐지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봉건제 폐지선언) 그와 함께 혁명의 이념이 담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선언)을 채택하였다. 이제 국민의회는 초기에 요구했던 헌법을 제정하기로 하였다. 91년 헌법의 제정이다. 91년 헌법에서 시민은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으로 나뉘고, 이 중 능동적 시민에게만 참정권을 인정했다. 이로써 입법의회가 출범하였다.
입법의회는 두 분파로 나뉘었는데 기존 자코뱅파에 로베스피에르로 인해 공화주의자가 늘어나자 입헌군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코뱅파를 나와 페이앙파를 만들었다. 하지만 입법의회를 이끌어나간 건 둘 중 어느쪽도 아닌 중간파인 지롱드파였다. 지롱드파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절대주의 체제에 철퇴를 가할 혁명전쟁을 시작했다. 신념으로 시작한 전쟁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혁명으로 인해 군대를 지휘할 귀족장교는 다수가 외국으로 망명하여 병력 공백이 심각했다. 그로인해 혁명군은 패전을 거듭했고 위기감을 느낀 프랑스는 의용군을 조직하였고 그 결실을 맺어 발미에서 프로이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그와 동시에 국민공회가 시작되었다.
이전 국민의회시절 국외로 도망가려다 잡힌 (바렌느 도망 사건) 루이 16세는 혁명전쟁의 계속되는 패전이 그 자신이 외국과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결국 국민공회 때 처형당하게 된다. 국왕의 처형은 유럽 군주제 국가에게 위기감을 선사했고 이는 혁명전쟁의 적이 늘어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대규모 징집을 시행되었다. 그와 동시에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면서 반혁명반란이 잇달았고 국민공회는 지방을 감시하기 위해 혁명재판소와 공안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민중의 힘을 받은 자코뱅파는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공포정치를 주도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반대파들을 수도없이 숙청하였고 이는 자코뱅파의 분열로 이어졌다. 신임을 잃은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혁명의 과격성을 경계한 테르미도르파는 95년 헌법을 제정하고 5명의 총재가 주도하는 총재정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허약한 총재정부는 곧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이는 마치 과거 허정과도정부와 장면내각이 5.16군사정변으로 끝이난 것과 과정이 유사하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법전을 선포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혁명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중은 안정을 택한 것이다.
제1제정시기 나폴레옹은 전 유럽으로 나아갔다. 곧바로 전유럽은 프랑스 제국의 위성국가와 반강제적 동맹국으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이에 속하지 않았는데 나폴레옹은 괘씸한 영국에 대륙봉쇄령을 통해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봉쇄령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자 러시아원정을 나서게 된다. 러시아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은 엘바섬에 유배되었다. 후일 엘바섬을 나와 재집권을 획책했으나 워털루전투에 패하고 추방되었다.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프랑스혁명의 이념이 전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자유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폴레옹으로 인해 굴욕을 맛본 국가들에게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는 유럽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퍼져나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빈회의를 통해 시계바늘을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돌리고자 하였다. 유럽의 국제협력으로 보수반동적인 빈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메테르니히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빈체제는 곧 벽에 맞닥드리게 된다.
민족주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아메리카의 식민지 독립을 탄압하고자 하였으나, 영국은 상품시장 형성을 이유로 독립을 찬성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미국은 먼로주의를 통해 유럽의 아메리카 개입을 경고하는 고립주의를 선언했다. 그리고 빈체제는 그리스독립전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기반을 둔 유럽의 사정상 그리스독립을 지지하고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1830년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한 루이18세의 뒤를 이어 보수반동적인 샤를 10세가 즉위하면서 파리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났다.(7월 혁명) 시민의 지지를 받아 루이 필립이 즉위하였다. (7월 왕정) 하지만 처음 기대와 달리 보수적인 정치를 이어나간 7월왕정에 대해 사람들은 불만을 품게되고 2월 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이 시작된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과 2월 혁명은 전 유럽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오스트리아에서도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3월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결과 메테르니히는 실각했고 이로써 빈체제도 종말을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