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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과 빈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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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만큼 역사적으로 세계적으로 영향을 남긴 사건도 드물것이다. 물론 프랑스혁명이 당시 조선에 미친 영향은 없거나 있다하더라도 아주 미약할 것이다. 하지만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 프랑스혁명이 미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으며, 이는 한국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프랑스혁명으로 만들어진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 한 획을 그었으며 현대 정치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프랑스혁명을 이해하는 것은 기본적인 소양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혁명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당시 프랑스의 구제도적 모순 즉 앙시앵레짐에 있다. 아직 프랑스에는 신분제가 남아 있었으며, 그 신분은 총 셋으로 나뉜다. 제 1신분은 성직자, 제 2신분은 귀족이며 이 두 신분은 특권계급이다. 그리고 나머지 제 3신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다시 귀족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두 종류로 분화되는데 기존 대검귀족(출생으로 정해진 혈통귀족)과 새롭게 대두한 법복귀족(부르주아출신)이다. 18세기 후반 영주들은 지대 등 공납을 올리고 이미 소멸한 공납까지 징수하고자 했다. (조선시대 삼정의 문란 당시 횡횡했던 황구첨정과 백골징포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이러한 과도한 징세는 농민들의 큰 부담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봉건적 반동’이다. 봉건적인 잔재로 인해 고통받은 건 농민들뿐 아니라 부르주아지도 마찬가지였다. 상업과 금융업에 종사하는 시민계급은 신분적으로 귀족의 하위에 속했으며 길드등의 잔재로 자유로운 무역이 어려웠으며 그로 인해 자본주의 발전에 방해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 3신분은 점차 귀족계급에 대한 불만감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 불을 지핀 것이 당시 왕실의 재정문제이다. 흔히 예상하는 바와 달리 혁명의 시작은 귀족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고질적인 왕실의 재정문제는 루이 16세에 이르러 걷잡을 수 없이 비대해졌으며 각종 개혁안을 구상했지만 이해관계로 인해 번번히 실패하였다. (튀르고 개혁안, 네케르 개혁안, 칼론느 개혁안) 귀족 계급은 왕실의 재정위기를 기회로 절대왕권을 억누르고 귀족정치의 실현을 꿈꾸었다. 그렇기 때문에 칼론느가 소집한 명사회에서 그의 개혁안을 거부하고 고등법원을 통해 삼부회 소집을 요구하였다. 재정적으로 파탄이 난 루이 16세는 더이상 거부할 수 없는 상태였고 결국 삼부회가 소집된다.

 

삼부회의 소집으로 억압받던 제 3신분은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희망은 곧 좌절되고 만다. 각 신분은 300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신분별로 투표가 행해지기 때문에 제 1신분, 제 2신분의 투표를 제 3신분이 이길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제 3신분은 머릿수를 기준으로 한 표결을 요구했다. 그와 동시에 국민의회를 선포하고 두 신분에게 참여를 종용하였다. 국민의회의 시작이다.

 

하지만 곧 국민의회는 회의장이 폐쇄당하게 된다. 이에 시민계급들은 회의장을 베르사유궁전 내의 실내테니스장으로 옮기고 자신들의 요구가 담긴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이 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테니스코트의 서약) 국왕 루이 16세도 어쩔 수 없이 국민의회에 참가할 것을 나머지 신분에게 지시하였다. 이렇게 사건은 일단락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국왕 루이 16세가 베르사유에 군대를 집결시켰다는 소식이 파리에 전해졌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국민의회가 공격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국민의회를 지키기 위해 민병대를 조직하였고, 무기를 찾던 민중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여겨진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실제로 바스티유 감옥에는 정치범은 없었고 무기또한 얼마 없었지만 혁명의 첫 승리를 장식한 민중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때 귀족들이 외세의 힘을 빌려 혁명을 진압하려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공포에 휩싸인 민중들은 귀족을 습격하고 성에 불을 질렀다. 이 소식은 바로 파리에 전해졌고, 귀족이 포함된 국민의회 시민대표들은 당황했지만 혁명은 농민의 지지없이 불가능했으므로 곧바로 봉건제를 폐지하겠다는 선언을 하였다. (봉건제 폐지선언) 그와 함께 혁명의 이념이 담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인권선언)을 채택하였다. 이제 국민의회는 초기에 요구했던 헌법을 제정하기로 하였다. 91년 헌법의 제정이다. 91년 헌법에서 시민은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으로 나뉘고, 이 중 능동적 시민에게만 참정권을 인정했다. 이로써 입법의회가 출범하였다.

 

입법의회는 두 분파로 나뉘었는데 기존 자코뱅파에 로베스피에르로 인해 공화주의자가 늘어나자 입헌군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자코뱅파를 나와 페이앙파를 만들었다. 하지만 입법의회를 이끌어나간 건 둘 중 어느쪽도 아닌 중간파인 지롱드파였다. 지롱드파는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절대주의 체제에 철퇴를 가할 혁명전쟁을 시작했다. 신념으로 시작한 전쟁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혁명으로 인해 군대를 지휘할 귀족장교는 다수가 외국으로 망명하여 병력 공백이 심각했다. 그로인해 혁명군은 패전을 거듭했고 위기감을 느낀 프랑스는 의용군을 조직하였고 그 결실을 맺어 발미에서 프로이센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 그와 동시에 국민공회가 시작되었다.

 

이전 국민의회시절 국외로 도망가려다 잡힌 (바렌느 도망 사건) 루이 16세는 혁명전쟁의 계속되는 패전이 그 자신이 외국과 내통했다는 의심을 받았고 결국 국민공회 때 처형당하게 된다. 국왕의 처형은 유럽 군주제 국가에게 위기감을 선사했고 이는 혁명전쟁의 적이 늘어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대규모 징집을 시행되었다. 그와 동시에 경제적 상황이 나빠지면서 반혁명반란이 잇달았고 국민공회는 지방을 감시하기 위해 혁명재판소와 공안위원회를 설치하였다. 민중의 힘을 받은 자코뱅파는 지롱드파를 숙청하고 공포정치를 주도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반대파들을 수도없이 숙청하였고 이는 자코뱅파의 분열로 이어졌다. 신임을 잃은 로베스피에르는 결국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혁명의 과격성을 경계한 테르미도르파는 95년 헌법을 제정하고 5명의 총재가 주도하는 총재정부를 만들었다. 하지만 허약한 총재정부는 곧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이는 마치 과거 허정과도정부와 장면내각이 5.16군사정변으로 끝이난 것과 과정이 유사하다.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법전을 선포하고 국민투표를 통해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혁명으로 혼란스러웠던 민중은 안정을 택한 것이다.

 

제1제정시기 나폴레옹은 전 유럽으로 나아갔다. 곧바로 전유럽은 프랑스 제국의 위성국가와 반강제적 동맹국으로 정리되었다. 하지만 영국은 이에 속하지 않았는데 나폴레옹은 괘씸한 영국에 대륙봉쇄령을 통해 고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봉쇄령을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자 러시아원정을 나서게 된다. 러시아원정에 실패한 나폴레옹은 엘바섬에 유배되었다. 후일 엘바섬을 나와 재집권을 획책했으나 워털루전투에 패하고 추방되었다.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프랑스혁명의 이념이 전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자유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폴레옹으로 인해 굴욕을 맛본 국가들에게 민족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재상 메테르니히는 유럽에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퍼져나가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빈회의를 통해 시계바늘을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돌리고자 하였다. 유럽의 국제협력으로 보수반동적인 빈체제가 시작된 것이다. 메테르니히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철저히 탄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빈체제는 곧 벽에 맞닥드리게 된다.

민족주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아메리카의 식민지 독립을 탄압하고자 하였으나, 영국은 상품시장 형성을 이유로 독립을 찬성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미국은 먼로주의를 통해 유럽의 아메리카 개입을 경고하는 고립주의를 선언했다. 그리고 빈체제는 그리스독립전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스와 로마의 기반을 둔 유럽의 사정상 그리스독립을 지지하고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1830년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한 루이18세의 뒤를 이어 보수반동적인 샤를 10세가 즉위하면서 파리에서 자유주의 혁명이 일어났다.(7월 혁명) 시민의 지지를 받아 루이 필립이 즉위하였다. (7월 왕정) 하지만 처음 기대와 달리 보수적인 정치를 이어나간 7월왕정에 대해 사람들은 불만을 품게되고 2월 혁명이 일어나 공화정이 시작된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7월 혁명과 2월 혁명은 전 유럽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오스트리아에서도 2월 혁명의 영향을 받아 3월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결과 메테르니히는 실각했고 이로써 빈체제도 종말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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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본에 가기 주저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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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는 우리에게 날개이기도 하지만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무언가 조사할 때 외국어를 할 줄 알면 그 정보량은 배로 늘어나지요. 이때 외국어는 날개입니다. 하지만 외국어로 발표를 하는 상황은 어떻습니까? 모국어만큼 유창하고 적확한 표현을 사용한 발표가 가능할까요? 많은 경우 그렇지 못합니다. 이 경우 외국어는 족쇄가 됩니다. 모국어로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을 100퍼센트 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으로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학습한 것이 2011년, 중학교 2학년 때이니 올해로 일본어를 배운지 12년이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에게 일본어는 극복하지 못한 산이기만 합니다.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에 무지개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소년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손에 닿을 것만 같았던 무지개는 소년이 아무리 다가가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언어란 무지개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조차 한국어를 완벽히 습득했다 말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외국인이라면 오죽할까요?

사실 일본에서 일본어를 참 잘한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제가 외국인이라는 전제하에 나온 칭찬입니다. 제가 일본인이라면 참 말못한다는 평가를 받았을테지요. 어쩌면 외국인이라는 둘레 속에서 제 일본어 실력에 만족하면서 살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무지 제게는 저 멀리 네이티브의 유창성과 표현력이 탐이 나고 탐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멀리 있는 무지개를 쫓고자 하는 마음은 때로는 제 일본어 실력에 날개를 달아주는 향상심이기도 했지만 오랜 기간 제 언어 실력에 회의감을 가지게 하고 무력감을 안겨주는 족쇄이기도 했습니다.

외국어 실력에 대한 무력감은 여느 다른 학문과 결을 달리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학문은 원어민이 없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미적분을 하는 사람은 없지요. 모두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산수를 하고 중고등학교 때 미적분을 배웁니다. 하지만 외국어 실력은 모국어 화자라는 강력한 비교대상이 존재합니다. 그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자주 무력감을 안겨줍니다. 외국어 학습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꾸 무너지는 젠가를 쌓는 일이 어렵듯이 말입니다.

제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일본어와 함께 했지만 아직도 저에게 일본어는 어렵기만 합니다. 아직도 3페이지가 넘어가는 일본어 학술지를 읽지 못하고 번역기에 기대고 맙니다. 일본어로 진행되는 회의는 한국어로 진행되는 회의보다 몇 배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그런데 주변 모든 것이 일본어로 가득한 상황을 제가 감히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사전을 검색하고 검색이 여의치 않으면 그저 아는 척하며 넘어가야 하는 삶... 물 속에 들어가면 목소리가 번져서 잘 들리지 않듯이, 집중하지 않으면 그저 둥둥 떠다니는 말을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삶...

그저 무섭기만 합니다. 아직도 자신이 없기만 합니다. 나약한 목소리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저는 나약합니다. 그래서 모든 해외생활을 하는 분들이 대단하게만 느껴집니다.

대학생활이 점점 막을 내리는 것이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그 순간이야말로 당당히 일본에 가서 살아보겠다 말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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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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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예상치 못한 감염병이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를 덮쳤다. 코로나19로 전세계 모든 경제가 정지되었고, 각 정부는 한동안 대처 방안을 마련하지 못해 난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이 이어지자 사람들은 하나 둘 적응하기 시작했다. 교실에서 이루어지던 수업에서 온라인강의가 부상했고, 회사로 출근하던 사람들은 집에서 화상회의를 통해 업무를 보았다. 감염 위험으로 공간의 구속을 가져온 코로나는 역설적으로 공간의 제약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버스를 타고 회사에 가는 대신 집에서 인터넷을 통해 서로와 연결된다. 또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여러가지 취미활동도 인터넷을 통해 유행을 탔다. 달고나커피와 홈트레이닝 등… 이처럼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우리의 일상은 전과 다른 생활로 변모했다. 이러한 변화가 이제 표준으로 자리하고 있다. 새로운 표준, 바로 뉴노멀(new-normal)이다.

 

하지만 이러한 뉴노멀은 코로나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산업혁명 시기 농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도시로, 공장으로 발을 돌렸고, 마부들은 자동차의 발명으로 직업을 잃었다. 최근엔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발명으로 생산성이 크게 증대되었고 이 둘은 우리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존재로 자리잡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문명은 발전을 거듭했고 우리는 그에 발맞추어 생활을 바꾸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이 급격한 변화를 요하는 일이 없었기에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문명의 발전이란 강은 더 빠른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흘러간다면 이는 종이배로 파도를 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제 대비를 할 필요가 있다. 종이배가 아닌 커다란 배를 준비해 변화의 흐름에 유연하게 대처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가. 그 전에 이 뉴노멀의 특징에 대해 우선 살펴볼 필요가 있다. 뉴노멀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제약이 사라짐에 있다. 기존에 불가능했던 것들이 점점 가능해지고 있다. 전화의 발명으로 우리는 멀리 떨어진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비행기의 발명으로 단시간에 외국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공간과 시간은 이제 우리의 적이 아니다. 우리는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소통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를 읽은 기업들은 현재 승승장구하고 있다. 화상회의 플랫폼 웹엑스와 줌은 도약을 거듭했고, 유례없는 배달과 택배 서비스의 호황이 찾아왔다. 반대로 기존의 대면 중심 영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음식점들은 하나 둘 배달서비스를 시작했으며, 헬스장 영업정지로 인해 유튜버의 길을 걸은 사람도 생겼다. 코로나는 점점 우리의 삶을 죄어오고 있다. 이젠 강한 자가 아닌 빠른 자가 살아남는 시대가 된 것이다.

 

뉴노멀의 또 다른 특징은 소통에 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사람은 사람을 원하게 유전자적으로 설계되어져 있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접촉이 금지된 지금 사람들은 어떻게 소통하는가. 비대면 소통이 그 대안으로 부상했다. 단순히 목소리만 주고 받는 클럽하우스라는 어플리케이션이 유행을 탔으며, 기존 회식을 온라인 술자리로 대신하는 움직임도 늘고 있다. 오히려 물리적 한계를 넘어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를 TV에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인스타그램을 통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쌍방향 소통의 등장이다. 코로나로 인한 피로감과 우울감이 우리를 덮쳤지만, 우리는 소통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 끈을 꼭 쥐고 절대로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만큼 인간에게 소통은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답을 알 것만 같다. 바로 속도와 소통이다. 빠른 상황대처능력과 의사소통능력 이 두가지가 앞으로의 시대를 열어가는 열쇠가 될 것이다. 이는 제4차 산업혁명의 흐름과 물결을 같이 한다. 제4차 산업혁명으로 앞길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측에 실패하더라도 유연하게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에 맞추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아무리 기계와 인공지능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인간 간의 의사소통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빛을 발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술의 발달로 인해 생겨날 인간의 소통문제를 걱정한다. 하지만 기술은 인간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기술은 그 답을 찾아왔다. 기술의 한계를 기술이 해결하고 있다. 코로나 상황에서 생긴 의사소통의 제약을 기술이 해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기술주의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옳지 않다.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다. 폭포의 흐르는 물을 거꾸로 돌릴 수 없듯이 말이다. 산업혁명 시기 러다이트 운동이 실패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더 이상 단순히 무언가를 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고 빠르게 대응하고 더 나은 소통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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