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 여긴 참 신기한 동네야"
유이가 하교할 때마다 지나치는 관광객을 보며 항상 하던 말이었다.
"가마쿠라하면 고즈넉한 분위기일 줄 알았는데, 막상 관광객은 이렇게도 많아. 그런데도 그 환상이 사라지지 않는 건 뭐람"
"Nu știu, 유이 너도 어찌보면 turist 아니야? turist pe termen lung"
"하긴 아직 여기에 온지 5년도 안되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네"
유이도 나도 가마쿠라가 낯설다. 비록 태어난 곳은 다르지만, 우리는 루마니아에서 살다 왔다는 공통점이 있었고, 그래서인지 가끔 루마니아어를 섞어쓰곤 했다.
나로써는 답답할 때 모국어로 소통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고, 유이는 남들 모르게 비밀의 언어를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내가 자란 곳은 루마니아의 북쪽에 위치한 이아시라는 곳이었다. 바다랑 다소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넘실거리는 파도에 푹 빠져서, 학교가 끝나면 매일같이 노을이 지는 바다를 찾곤 했다.
반대로 유이는 초등학교 때 무역회사에 일하시는 아버지를 따라 부쿠레슈티로 이주했고, 현지 일본인학교를 다니면서 조금씩 루마니아어를 배웠다. 그 덕분에 이렇게 모국어를 섞어 써도 유이는 척하고 알아듣는다.
하지만, 같은 나라라고 해도 동네 풍경은 외국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다르다. 6년 전 어머니 친구 결혼식에 따라 갔을 때 본 부쿠레슈티는 너무나 삭막해서 이곳이 학교에서 배운 소련이라는 곳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말을 유이에게 하면, 유이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아니아니 București가 조금 삭막하긴 해도 소련은 아니지!! Republica Socialistă 무너진게 언젠데!"
그렇게 가마쿠라에서의 나날이 계속될 줄 알았다. 아니 언젠가 이 마을을 떠날 날이 각자 찾아오겠지만, 적어도 그건 대학생 정도의 이야기일거라 생각했다.
고교 입시 이야기가 한창일 때, 유이가 갑작스레 이별을 고했다.
"블라, 나 이 도시를 떠날거야. 그러니까 La revedere야"
블라라는 건, 나를 부르는 유이만의 애칭 아닌 애칭이었다.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이 너무 권위있게 느껴진다나. 일본 친구들이 애칭을 부르는게 조금 부러웠던 모양이다.
"Dece? 아직 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당연히 현내 고교에 진학할 줄 알았는데..."
"고등학교 가서도 부활동(동아리) 계속 하려고. 전국 콩쿠르에 나가려면 사이타마에 있는 학교가 아니면 힘들어"
유이는 중학교 내내 취주악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가끔 부활동을 빼먹고 나랑 같이 바다에 놀러가서 진심이 아닌 줄 알았는데...
"음대를 노리는거야?"
"그건 잘 모르겠어. 그냥 취주악이 하고 싶어서"
"누가 가마쿠라 출신 아니랄까봐. 취주악계의 안자이 선생님을 만나길 빌게"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역시 외국 경험이 있는 친구는 이별도 시원해서 좋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직 다른 친구들한테는 말 못했구나"
"어떻게 말해... 카나는 엄청 울게 불보듯 뻔한데..."
"하긴... 한동안 울고불고 늘어지도록 붙잡겠지만 잘 버텨봐. 너가 선택한 거잖아"
가끔 유이는 부활동을 빼먹은 날, 나를 데리고 바다에 와서 색소폰을 불곤 했다.
"그럴거면 빠지지나 말지. 굳이 땡땡이를 치고 색소폰을 불겠다고?"
"여기선 바다가 청중이잖아. 꽉막힌 교실에서 부르는 거보다 훨씬 재미있어"
리드를 넣기 전, 유이가 당당히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멜로디였다. 유이에게 물어보니 비발디 사계 중 겨울이라고 했다. 지금은 가을인데 겨울이라니...
"뭐 어때 여름도 아니고, 가을 정도면 겨울의 친구같은 거잖아. 우리처럼!"
유이가 가마쿠라를 떠난 이후 나는 가마쿠라 바닷가에서 종종 이어폰으로 비발디 겨울 연주를 듣곤 한다.
그리곤 이 풍경과 참 어울리지 않는 곡이라 생각한다. 그럴 때면 유이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가마쿠라, 여긴 참 신기한 동네야"
조용하면서 시끄러운 동네, 마치 가마쿠라와 겨울 같다.
곡은 클라이맥스를 넘어 잔잔해졌고, 그에 따라 넘실거리는 파도도 조금 잔잔해진 것 같다.
어쩌면 파도는 청중이 아니라 지휘자가 아닐까?
오늘도 겨울을 들었다. 그때는 다가올 겨울이었는데, 이제는 지나간 겨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겨울은 유이와의 이별이었다.
멜로디는 남았고, 유이는 떠났다. 악보 속 8분 음표가 조용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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