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는 채찍 같은 거야. 우리를 달리게 해주지만, 더럽게 아프지.”
오랜만에 만난 지은이 꺼낸 말이다.
3년을 준비한 공무원 시험을 내려놓고, 갑자기 쉬겠다며 유럽으로 훌쩍 떠난 지은이었다.
“이제는 채찍 맞고 달리지 않을거야. 그냥 내가 가고 싶은대로 달릴거야.”
2년만에 돌아온 지은은 더이상 공무원준비생이 아닌 작가가 되어 있었다. 사인회 준비를 위해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만났을 때, 지은은 변함없이 당당했다. 달라진 건 당당함에 이유가 있다는 것뿐.
“내 삶의 지은이가 되는거지, 대필 작가가 아니라.”
유럽에서 무언가 깨달은듯, 지은이 입을 열었다.
“좋은 말이긴 한데, 뭔가 되게 요즘 나오는 힐링에세이 같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유럽을 가기 전에도 지은은 ‘지은’이었고, 또 ‘지은이’였다.
“유럽에 가니까, 내 성이 또 이씨잖아. 다들 이지은이 아니라 지은이로 불러주더라고. 뭔가 더 ‘지은이’가 된 느낌이었어.”
그거 알아? 너만의 삶을 살라는 힐링에세이도, 작가는 돈과 인정을 위해 출판을 해. 아이러니한 일이야.
결국 우리는 나만의 삶을 살려고 해도, 지독하게 남과 얽히고 만다는 말이지.
“앞으로는 뭘 할거야?”
“글쎄… 이제는 계획 세우는 거 그만두려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일 죽는데 시험 준비하고 있다 생각하면, 조금 슬프잖아.”
사실 작가준비생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글을 쓰면 누구나 작가이자 지은이다. 공무원준비생이 공무원이 아닌 것과는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지은이 택한 작가라는 직업이 납득이 갔다. 언제 인생이 끝나더라도 지은이는 준비생이 아니라 작가이자 지은이다.
내일 죽는다면 오늘 시험 준비를 하는 건 왜 슬프게 느껴지는 걸까. 결국 우리는 죽음 앞에서 완성된 인생을 살아야한다는 거대한 목표에 깔려있는 걸까?
“결국은 죽음 앞에선 누구나 준비생이네.”
“필멸자의 숙명이지.”
“근데 막상 작가가 되면 준비생이 부러워진다.”
“그래?”
“작가가 되면 세금처리나 출판계약처럼 복잡한 게 너무 많아지거든. 그래서 오직 출간 하나만 바라보고 글을 쓰던 시절이 그리워지게 돼.”
“힘들지만 목표가 있는 편이 더 보람차다는 의미인가?”
“떠나기 전에 했던 말 기억나? 목표는 채찍 같은 거라 우리를 달리게 해주지만, 더럽게 아프다고… 그때는 목표에서 벗어나려고 아둥바둥이었는데 돌아보니 목표가 있던 삶이 그리워질 때가 있어.”
“사는게 참 쉽지 않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목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하는 거 같아. 아이러니하지. 목표에서 벗어나려는 새로운 목표가 생기고 마는게.”
“그러게 제일 어려운 거 같다. 목표 없이 흘러가는대로 산다는거. 그래서 다들 무언가를 기대하고 짊어지고 사는건가봐.”
삶의 목표라는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때때로 목표가 버거울 때가 있다. 우리를 달리게 해주는 목표가 지칠 때는 어느새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짐을 내려놓는다고 금방 홀가분해지는 건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는 채찍이 아파 도망치면서도, 채찍이 사라지면 무엇을 향해 달려야 할지 몰라 뒤를 돌아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더이상 목표 없이 사는 삶을 상상하지 않는다. 다만 가끔은 내가 달리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달리는 건지, 아니면 멈추면 안 될 것 같아서 달리는 건지.
채찍을 버리는 것보다 어려운 건, 어쩌면 내 발로 달리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글을 나의 친구 이지은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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