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환경부 산림청 산림자원관리과 소속 6급 진민석입니다. 지금은 2024년 5월 23일 목요일이군요.
어쩌면 제가 지금 말한 자기소개조차 제대로 전달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설령 당신이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쩌면 이 편지에 적힌 문자를 해독하지 못한다고 해도요.
이 편지를 누군가가 읽고 있다는 건 어떠한 방식으로든 인류가 지구에서 살아남았다는 증거니까요.
우리는 지금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얼마전 강원특별자치도 태백시에 위치한 산림을 연구하는 중에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소나무에서 갈라진 흔적이 있었고, 놀랍게도 그 갈라진 흔적에서 새빨간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장난을 친줄 알았지요. 하지만 이내 그게 아니란 걸 알게되었습니다. 온나라 공문을 통해 이 것이 태백시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국에서 발생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처음 발견했다는 사실 하나로 정부 브리핑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급히 산림청과 각 대학의 환경학과 및 생명공학과 교수들이 태백을 방문해, 표본을 수집하고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밝혀진 사실은 이것이 전염되는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아일랜드를 기근으로 몰아넣은 감자역병처럼 말입니다.
한국에서 시작된 소나무 전염병은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연구결과, 이 역병균은 소나무 뿐 아니라 대부분의 목본 식물에 전염된다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그 순간 한국은 고립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한국에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이 역병이 옮는 순간, 세계에서 나무라는 건 공룡처럼 역사의 흔적으로 변하게 될테니까요.
앞서 분기점이라는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우리는 역사의 순간에 서있습니다. 아마도 이 역병은 세계로 퍼져나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도 몇몇 개체가 전염되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나무라는 게 존재했음을 미래에 알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기도하다보면 언젠가 역병을 이기는 새로운 종이 탄생할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력했는지. 우리는 가끔 착각하곤 합니다. 광산을 채굴하고, 농사를 짓고, 공장을 세우면서 마치 우리가 이 지구의 주인인 것처럼 행사하지만, 결국 우리도 보잘것 없는 생명체에 불과합니다.
이제 사라진 나무로 땅은 황폐해지고 숨 쉬기 어려워지겠지요. 기후가 변하고 지구는 지금을 기회삼아 인간이라는 기생종을 역사의 흔적으로 남기고자할 것입니다.
아직 살아남았다면 우리가 아닌 나무를 기억해주십시오. 이 땅에 나무라는 푸르고 거대한 생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아직 여기에 적힌 문자를 읽을 수 있다면, 이상한 부분이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산림”, “나무”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푸르름이 가득한 세계를 남기고 싶어 우리는 많은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랜 기간 보존이 가능하도록 약품을 사용해 보존처리를 했습니다. 부디 이 푸르름이 후대에도 전달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에 사진 몇장을 남깁니다. 그리고 마음 같아서는 이 역병이 해결되어 다시 푸르름을 되찾아 제가 방금 한 말에 코웃음 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다시 찾은 에노시마는 조금은 그대로였고, 조금은 바뀌었을테지만 진혁은 그 바뀐 부분을 눈치챌 수 없었다.
그야, 기억이 깨진 유리조각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더 이상 그 조각을 모아 온전한 기억을 만드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함 없는 건 그 때도 해가 뉘엿뉘엿 질 때 방문했다는 점이고, 달라진 건 그때와 달리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단순히 돈이 아까웠을지도 모르고, 그때는 헤어짐의 여행이었지만 지금은 재회의 여행이기 때문에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이곳을 느껴보겠다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어둠이 찾아온 에노시마는 햇빛과 함께 인적도 사라져갔다. 특별 요금을 더해 들어온 전망대는 노을을 찾아온 관광객과 커플들로 조금 북적였지만, 10분도 지나지 않아 전망대는 진혁과 달, 둘만의 공간이 되었다.
5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변했는지 알 수 없었던 에노시마와 달리, 달만큼은 변함 없이 진혁을 비추고 있었다. 2층에 올라가니 진혁과 바다를 가로막는 유리창이 사라졌고, 거친 파도소리가 진혁의 귀를 간지럽게 만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새들을 보며, 진혁은 자유로움과 동시에 너무나도 자유롭기에 방황하는 새들을 생각했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자유를 추구하지만, 그런 강박 자체가 우리를 자유롭지 않게 만드는 건 아닐까. 세상 많은 것이 무언가를 목표로 할수록 오히려 목표에서 멀어지고 만다.
진혁은 지상낙원을 만들겠다며 혁명을 일으킨 독재자들 몇명을 머릿속에서 떠올렸고, 이내 지워버렸다.
걷잡을 수 없는 상념을 뒤로 하고, 진혁은 하나둘 조명이 들어온 정원을 지나쳐, 왔던 길을 내려왔다. 그 와중에 마음에 드는 엽서 몇장을 샀고, 5년 전과 달리 현금이 아닌 QR코드 결제로 가뿐히 계산을 마쳤다. 사람들의 외면을 받는 동전을 동정하면서 말이다.
후지사와 역으로 가는 노면전차에는 하교하는 학생들과 관광객이 적절한 비율로 섞여, 일상과 비일상이 서로에게 무관심한 채, 바삐 역으로 옮겨졌고, 역에는 급격한 일상의 유입으로 비일상은 곧 자취를 감추었다.
퇴근하는 회사원과 하교하는 학생 사이에서 진혁은 자신이 일상인지 비일상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그리곤 이내 일상과 비일상의 어중간한 경계에서 살아야함을 직감했다. 그것이 조국을 떠난 이의 운명이리라 진혁은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으로 향하는 전철이 도착했고 진혁은 그 속에 몸을 숨겼다. 전철은 누군가에겐 일상일지 모를 비일상을 지나 진혁의 일상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차창너머 풍경이 영화 필름을 되감는 것처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달리는 전철 속에서 진혁은 가마쿠라 바닷가에서 조개껍데기를 줍는 상상을 했다. 하나하나 줍는 조개껍데기가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이라 생각하며...
"아이러니하지 않아? 결국 작가가 그린 그림은 작가의 손이 아니라 여기 미술관에 오게 되는거... 그리고 그걸 영광으로 생각해 다들..."
"그러게... 어쩌면 미술관은 주인 곁을 떠난 작품들이 모이는 공동묘지 같은 곳이 아닐까? 그래서 미술관인거지, 미술 '관'."
종수는 조용히 작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작품이라면 미술관에 있고 싶을까? 언젠가 동물원처럼 미술관도 작품을 생각해서 풀어줘야한다는 발칙한 생각마저 들었다.
미술관을 떠난 작품은 어디로 가고 싶을까? 종수는 미술관에 갇힌 작품들이 꿈꾸는 곳을 서로 이야기하는 상상을 했다. 저 그림은 정물화니까 집 밖을 벗어나 넓은 세계를 만나고 싶을지도 몰라. 무제인 저 그림은 이름을 가지고 싶겠지. 작가 미상인 저 친구는 나는 내 주인을 안다며 입이 근질거릴지도...